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8세 (문단 편집) === 내치 ===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후계를 제대로 정하지 못했으며 1021년 ~ 1022년을 풍미했던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의 난 등을 겪으며 말년에까지 군대 통솔을 포기할 수 없었던 바실리오스 2세가 죽은 뒤 콘스탄티노스는 군부와 관료를 모두 통제해야 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근위대같은 경우는 콘스탄티노스의 승계 결정이 알려지자 이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제국의 동단 바스푸라칸(Vaspurakan) 테마의 절도사를 맡고 있던 [[니키포로스 콤니노스]](Nikephoros Komnenos)가 1026년 / 1027년에 [[조지아 왕국]]과 내통하여 반란을 꾀한다는 첩보가 입수되기도 했다. 니키포로스는 즉각 체포되어 1년간 조사에 들어갔고 결국 조사 결과에 따라 콘스탄티노스는 그를 [[실명]]의 형벌로 처벌하였다.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아리스타키스와 야햐는 콘스탄티노스 8세의 시대에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오랜 전쟁 동안 강제되었던 알렐렝군이라는 세금 제도가 폐지되었다. 알렐렝군이란 [[연대책임|주변의 세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의 미납금을]] [[삼정의 문란|주변의 여유 있는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내도록]] 하는 제도였다. 로마노스 3세에 의해 직접적으로 폐지되었다는 소리도 있으나, 대체로 콘스탄티노스 8세는 [[나는 관대하다|형의 치세 동안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해 갇혀있던 사람들을 석방하고 신규 건축 중이던 감옥을 허물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알렐렝기욘은 가난한 백성들이 내지 못한 세금을 부유한 지주층에게 전가하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제도라 과연 개선인지 개악인지 불분명하다. 결국 교회의 반발로 로마노스 3세 때에 완전히 폐지되었다고 한다.] 다만 나브팍토스(Naupaktos)에서 행정 장관에 대하여 일어난 반란에 대해서는 다소간 엄격하게 대하여 주교가 실명 형벌을 받고 주민들 상당수도 처벌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Anthony Kaldellis는 비록 콘스탄티노스를 폭압적 통치자로 보지는 않으나 이를 체제의 불안성을 보여주는 초조함의 한 징후로 해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